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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복의 변천 史 제4편 조선시대 한복
작성자 한복나라 남가람 (ip:)
  • 작성일 2015-07-03 13: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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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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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의 변천 4편 조선시대 한복

 

 

 

조선시대 복식은 전기와 후기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 중기 중국의 왕조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는 국제 정세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한족에게 만주족 전통인 변발과 호복 강요하였고,

결국 중국 전역의 옷이 치파오로 바뀌게 되면서 () 양식의 전통이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위세는 조선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중국에서 들여온 공복이 몇 번의 개정을 거치며 국속화 되어 우리의 자체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중기에 일어난 복식 커다란 변화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이런 변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큰 전란을 겪으며 촉발 되었습니다.

전쟁 후, 이양법 보급으로 농업이 발달하고 상품 화폐 경제가 시작 되었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 하층민은 상류계층의 복식을 모방할 수 있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에서 벗어나 현실을 탐구하고자하는 실학이 태동해 새로운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영조, 정조 때 이르러 조선 전기 형성되었던 전통복식이 더욱 세련되게 자리 잡았습니다.

 

 

Chapter 01. 조선후기 전통한복의 남자 복식

 

1880년대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길모어 교사는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으뜸가는 관모의 나라(the land of hat)’라고 기록하고 있고,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의관의나라(衣冠之邦)’ 라고 부를 정도로 관모가 다양하게 발달했습니다.

    

*관모-머리에 쓰는 쓰개의 총칭, 좁은 의미로는 벼슬아치들이 쓴 모자를 말한다.

 

예를 들어, 사대부들이 일상복에 착용한 갓은 조선 선비를 상징하는데요, 정식 명칙은 흑립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관모입니다.

패랭이, 초립 등의 단계를 거쳐 정립되어 조선시대 대표 관모가 되었습니다.

양반 사대부의 징표여서 그 형태나 장식이 과시적으로 발달했습니다.

 

▽패랭이                                  초립                                            흑립


1814년 우리나라 서해안을 탐사했던 홀 선장의 기록에 따르면 배를 찾아온 조선 관원이 90cm 나 되는 모자를 썻다고 나와있습니다. 




이런 큰 갓과 함께 즐겨 착용한 포袍도 중,후기 국속화의 물결을 타고 다양하게 발전했습니다.

예를들어 사대부 일상복인 도포는 가장 격이 높은 옷으로, 천민들은 입지 못했습니다.

색깔은 흰색과 옥색위주로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가슴 아래 닿을 정도로 늘어진 갓끈과 세조대입니다.


*세조대-가느다란 띠.


 

신윤복의 야금모행

-갓과 도포를 입은 전형적인 사대부의 복식을 볼 수 있습니다. 길게 늘어진 갓끈과 세조대는 조선 후기 의복 양식의 특징입니다.

 

18c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존스는 흑립과 도포차림을

의장을 다 갖춘 범선(a full riggled ship under sail)" 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만큼  전통한복의 남자 복식은 위엄, 의젓함, 점잖음 등의 유교적 이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큰 갓과 큰 소매는 비 실용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허세와 낭비는 갑오개혁시 복식개혁의 쟁점이 되어 갓 크기와 높이를 줄이고 옷 소매를 모두 없애게 됩니다.

의복제도의 간소화로 두루마기가 등장하게 됩니다.

 

 

 

Chapter 02. 조선후기 전통한복의 여자 복식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저고리는 날로 짧아지고, 치마는 날로 커진다.'며

저고리 단소화와 치마가 장대화 된 조선 후기 여자 복식의 실상을 표현했습니다.


▽신윤복의 월하정인                                                                                                                                       신윤복의 미인도

 

월하정인의 쓰개치마로 얼굴을 감춘 여인을 통해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가 반영된 옷차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여자 복식은 여성다움을 은페함으로써 여성다움을 내비치는 '정숙함'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부각시켰습니다.


미인도의 여인은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는 당시 유행하던 여자 복식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저고리의 소매는 입고 벗기가 힘들 정도로 좁아 상체의 몸선이 그대로 드러나고, 치마허리의 띠와 끈이 노출되었습니다.

겨드랑이 밑으로  붉은색 속고름이 늘어져있는데 이런 차림을 두고 유학자들은 '요사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치마가 풍성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그 안에 속옷을 여러 벌 껴입었기 때문입니다.

상류층 부녀자들은 속치마로 오색 또는 칠색의 무지기를 입었습니다.

길이와 색깔이 다른 치마를 여러겹으로 층지개해 만들었는데

보통 갑사치마와 함께 입어 무지기의 여러 색깔이 은은하게 비쳐보이게 입었습니다.


*갑사치마-춘추절기용 홑치마.


▽ 무지기 속치마 




장대해진 치마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색깔이 다른 삼회장 저고리를 입거나

겉고름과 속고름을 길게 늘이고 노리개를 다는등 장식을 했고

특히 머리에 가체를 써 풍성하게 만들어 상경하중한 실루엣에 균형을 맞췄습니다.


*삼회장 저고리-깃, 고름, 곁마기, 소매 끝동에 옷길과 다른 색 천을 대어 만든 저고리

 

삼회장 저고리


   

한복 특유의 장식인 노리개가 있는에요, 그 기원이 삼국시대에 있을 만큼 오래 유지되어 온 우리 고유의 장신구입니다.

이것이 더욱 다채롭고 화려하게 발전했습니다.


가체가 점점 커짐에 따라 머리장식도 화려해졌습니다.



*뒤꽂이-쪽찐 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장식품.

*떨잠-대례복을 입고 큰머리를 할 때 머리에 꽂는 장식품한사람이 큰머리를 할 때에는 떨잠의 장식이 3개 필요하다.

*첩지-쪽머리의 가리마에 얹어 치장하던 장신구 



▽비녀                                                              뒤꽂이

떨잠                                                             첩지


가체가 심하게 사치스러워 지자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영, 정조 에 이르러 가체금지령이 내려집니다.

실효성은 없었는데 순조 1829 무렵에는 어느새 다소곳 쪽진 머리가 정착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치마의 변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풍성한 거들치마에서 차분한 꼬리치마를 입으면서 머리 크기도 치마의 풍성함과 함께 줄어들었습니다.

우리 전통 복식에 보편적인 디자인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우리 옷 한복은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오면서 여러 변화를 거치고 위기를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발전해 왔습니다.

고유의 미의식에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요.

우리만의 독특한 미학인 한복이 더 자랑스럽고 소중한 우리의 유산인 이유입니다.


이상으로 한복의 변천 史 시리즈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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